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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버넌트: 생존 본능과 복수의 심리학

by 1to3nbs 2025. 5. 3.

설원 위를 기어가는 부상당한 긴박한 남성 사진
설원 위를 기어가는 부상당한 긴박한 남성

 

영화 《레버넌트》는 단순한 생존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복수라는 감정이 어떻게 생존의 연료가 될 수 있는지를 냉정하면서도 시적으로 그려냅니다. 상처 입은 몸과 마음으로 광활한 자연을 버텨낸 휴 글래스의 여정은 우리가 잊고 있던 인간의 원초적 본능과 심리를 마주하게 만듭니다. 이 글에서는 《레버넌트》에 담긴 생존 본능, 복수심의 뿌리, 자연과 인간의 심리적 관계를 통합적으로 분석해 보겠습니다.

본능의 호출 – 인간이 짐승보다 더 짐승 같아질 때

《레버넌트》는 이야기 초반부터 극단적인 상황으로 관객을 몰아넣습니다. 곰에게 공격당한 주인공 휴 글래스는 몸이 거의 으스러진 상태로 눈밭에 내던져집니다. 그를 둘러싼 동료들은 생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를 버리거나, 심지어 죽이려까지 합니다. 여기서 관객은 질문하게 됩니다. “사람이 저런 상태에서 과연 살아날 수 있을까?” 하지만 영화는 곧 답합니다. 본능은 모든 가능성을 초월한다.

글래스는 그야말로 생존을 ‘당해야 하는’ 상황 속에 놓입니다. 그가 다시 눈을 뜨고, 땅을 기어, 얼어붙은 강물 속을 지나며 살을 찢고 뼈를 세우며 살아남는 장면들은 단순한 영화적 연출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살아야 한다’는 집요한 본능의 구체적인 구현입니다.

이 생존 본능은 먹이, 보금자리, 온기 같은 생리적 욕구와 결합해 더욱 극적으로 표출됩니다. 그가 부상에도 불구하고 동물의 시체 속으로 들어가 체온을 유지하고, 피 냄새가 진동하는 고기를 먹으며 살아가는 모습은 인간이 문명이라는 껍질을 벗고 가장 원시적인 존재로 돌아간 모습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런 본능은 ‘리비도(libido)’와 ‘타나토스(thanatos)’ – 즉 생의 욕구와 죽음의 충동 사이에서 생겨나는 긴장입니다. 글래스는 이 긴장 속에서 죽음을 매번 넘나들며 생존을 선택합니다. 더 나아가 이 본능은 단순히 ‘살고 싶다’는 차원을 넘어서, ‘살아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강박과도 연결됩니다. 이 점에서 생존은 육체적 행위이자, 정서적 사명으로 전환됩니다.

복수라는 이름의 감정 – 정의인가, 파괴인가

글래스의 여정이 단순한 생존기에서 ‘복수극’으로 전환되는 결정적인 순간은, 자신의 눈앞에서 아들 호크가 살해당하고, 가해자인 피츠제럴드가 그 죄를 덮어버릴 때입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슬픔이나 충격을 넘어서, 인간 내면의 ‘정의감’과 ‘보복 욕구’를 동시에 폭발시킵니다. 글래스는 몸이 부서진 채로 누워 있지만, 그 눈빛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으며, 그 복수의 결심은 생존보다도 더 강력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복수는 인간적인 감정인가, 아니면 파괴적 본능인가?
심리학자들은 복수를 ‘통제 상실에 대한 보상’이라고 설명합니다. 무기력하게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회복하기 위해 ‘반작용’을 선택합니다. 복수는 자기 회복의 방식이자, 정의 구현의 대리 수단이 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레버넌트》는 복수를 단순한 응징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영화는 오히려 “복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회의적 질문을 계속 던집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글래스는 피츠제럴드를 끝내 살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을 따라왔던 부족의 일원에게 피츠제럴드를 넘깁니다. 이 장면은 복수라는 감정을 외부로 전가함으로써, 자신은 고통에서 해방되는 동시에 인간으로 돌아가는 선택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영화 속 복수는 감정 그 자체보다 감정을 어떻게 다루는 가에 대한 이야기로 읽혀야 합니다. 복수는 인간을 살아남게도 하지만, 집착하게도 만듭니다. 그 경계 위에서 글래스는 마침내 복수보다 더 큰 감정, 용서, 해방, 인간다움을 선택한 것입니다.

자연은 적인가, 동반자인가 – 인간 존재의 무력함과 겸손

《레버넌트》는 대사가 적은 영화입니다. 그만큼 풍경이, 자연이, 사운드가 말하는 영화입니다. 설산, 숲, 강, 바람, 눈 등 모든 자연 요소가 인간과 끊임없이 부딪히고, 때론 감싸며, 때론 공격합니다. 글래스는 자연과 투쟁하면서도, 그 안에서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자연은 이 영화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심리적 전환 공간입니다.
야생 동물과의 대면하, 거대한 설원의 고요함, 찬물 속에서의 침묵은 모두 인간의 내면을 반추하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철학적으로 자연은 인간이 지배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이며, 심리학적으로는 인간의 ‘무의식’과도 같은 공간입니다.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감정, 고통, 트라우마가 자연처럼 들이닥치고 사라집니다.

글래스는 처음에는 자연을 버텨야 할 적으로 여기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과 동화되어 갑니다.
나무 가지를 땔감 삼고, 짐승의 가죽으로 몸을 감싸고, 강물에 몸을 맡깁니다. 마치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인간의 가장 깊은 상태, ‘융합’이 일어나는 듯합니다.
결국 자연은 글래스를 죽이기도 하지만, 살리기도 합니다. 그는 자연을 통해 인간의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존재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심리적 고립과 초월 – 혼자라는 것의 의미

《레버넌트》의 핵심 정서는 고립입니다. 글래스는 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철저히 고립된 상태에서 여정을 시작합니다. 누구도 그의 말을 듣지 않고, 그의 감정을 이해하지 않으며, 그의 싸움을 도와주지 않습니다. 이 고립은 인간이 감정적으로 가장 절망을 느끼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인간은 고립 속에서 자아를 발견합니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고립을 반드시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정신 분석학자들은 고립이야말로 자아와 무의식이 대면하는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글래스는 자연 속에서 혼자 걷고, 싸우고, 상처를 핥으며 결국 자신 안의 분노, 슬픔, 그리고 사랑까지 모두 마주하게 됩니다. 이 심리적 여행은 단순한 생존극이 아닌, 정체성 회복의 여정인 셈입니다.

그가 마지막에 복수를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도, 이 고립 속에서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했기 때문입니다. 외부 세계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이 여정은, 그 자체로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치유였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레버넌트’처럼 살아가는 중일지도 모릅니다. 겉으론 말없이 견디고 있지만, 속에선 생존과 감정, 복수와 용서가 치열하게 부딪히고 있죠.

결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레버넌트》는 단순히 한 남자의 복수극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을 묻는 작품입니다.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분노와 고통은 어떻게 삶의 연료가 되는가?
극한 상황에서도 인간다움을 지킬 수 있는가?

글래스는 처절하게 살아남았고, 복수를 생각했고, 그러나 끝내 선택했습니다.
그 선택은 복수보다도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을 놓지 않는 것, 자신을 다시 인간으로 만드는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우리는 삶의 가장 원초적인 질문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살아가는지를 포기하지 않는 그 마음이라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