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로마》(Roma, 2018)는 단순한 회고가 아닌, 기억을 통한 재현의 미학이자 한 시대의 정치적 불안과 여성의 존재를 교차시키는 깊이 있는 작품입니다. 1970년대 멕시코시티를 배경으로 하여, 중산층 가정의 가사노동자인 클레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이야기는 감독의 자전적 시선과 계급적 현실이 중첩된 화면 언어로 가득합니다. 이 글에서는 흑백 화면이라는 선택이 전하는 정서적 뉘앙스, 클레오라는 인물이 관찰자에서 중심으로 이동하는 과정, 그리고 역사의 변곡점에서 개인이 어떤 방식으로 흡수되고 소멸되는지를 중심으로 《로마》를 분석합니다.
흑백의 미장센, 감정의 잔상을 남기다
《로마》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바로 흑백의 영상미입니다. 알폰소 쿠아론은 이 작품에서 컬러를 배제함으로써 시각적 자극을 줄이는 대신, 인물의 감정선과 사물의 질감을 더욱 섬세하게 표현합니다. 흑백은 현실을 낯설게 만들며, 동시에 기억의 깊이를 시각화하는 효과를 줍니다. 특히 평범한 일상이 반복되는 집 안 풍경이나 거리에서의 군중 장면은 흑백의 차분한 톤으로 인해 더욱 ‘기억 속 장면’처럼 다가옵니다. 이 흑백 톤은 시청자의 감정이 화면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하며, 극적 연출보다는 서사의 감정선을 중심으로 따라가게 만드는 힘을 가집니다.
감정은 때로 명확한 색보다 ‘여운’으로 기억됩니다. 영화 속 바닥에 물이 고이고, 하늘이 그 안에 반사되는 장면은 색채 없이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이는 흑백이라는 제한 속에서 빛과 그림자, 질감의 농도를 정교하게 조절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소리의 배치 역시 흑백 미장센과 맞물려 더욱 강하게 작용합니다. 클레오가 병원에서 울부짖는 장면이나, 총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관객이 정적 속 불안을 감지하는 장면 등은 시청자의 감정에 직접적으로 파고듭니다.
이러한 시청 경험은 단지 시각적 미학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로마》의 흑백은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기억의 구조”를 시각화한 장치입니다. 쿠아론이 자신의 유년을 회고하며 선택한 이 색채의 부재는, 오히려 더 강렬한 감정의 유산을 전달하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흑백이라는 미장센은 영화 전반에 걸쳐 정적이면서도 서사적인 긴장감을 유지하고, 관객이 이야기 속 ‘공간’이 아니라 ‘시간’과 감정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가사노동자 클레오, 관찰자의 시선으로 본 세계
《로마》의 주인공 클레오는 그동안 영화에서 조명되지 않았던, 한 가정의 ‘배경에 존재했던 인물’입니다. 그녀는 오랜 시간 침묵 속에 묻혀 있던 이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존재입니다. 가사노동자이자 인디언 출신 여성인 클레오는 처음에는 이야기의 중심에 서지 않고, 마치 주변부를 맴도는 듯한 시선으로 등장합니다. 그녀는 조용히 집안을 청소하고, 아이들을 돌보고, 고요한 일상의 반복 속에 자신의 존재를 숨깁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녀의 시선은 더 이상 주변이 아닌 ‘세계’를 포착하는 프레임이 됩니다.
클레오의 시선은 비폭력적이며 관찰자적입니다. 하지만 그 관찰은 무기력함이 아닌, 세상을 바라보는 고요한 저항의 방식입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그리고 주인 가정과의 계급적 관계 속에서 그녀는 오랜 시간 ‘배경’으로 존재했지만, 영화는 그 배경을 서서히 전면으로 끌어올립니다. 특히 남자친구에게 버림받고, 유산을 겪으며 병원 침대에 홀로 누운 장면은 클레오가 겪는 삶의 폭력을 조용히 들려주는 순간입니다. 그녀는 큰 목소리를 내지 않지만, 말 없는 감정의 파장이 관객에게 강하게 전달됩니다.
그녀는 아이들을 구조하고, 가족의 위기를 조용히 감싸 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대가로 박수나 감사를 받지 않습니다. 대신 영화는 카메라를 통해 그녀의 존재에 존엄을 부여합니다. 클레오가 해변에서 아이들을 구한 뒤 주저앉아 오열하는 장면은, 마침내 그녀가 감정을 드러내는 드문 순간이자, 관객이 그녀를 단순한 ‘가정부’가 아닌 ‘하나의 인간’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전환점입니다. 《로마》는 클레오를 통해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여성들의 세계를 가시화하며, 동시에 그들의 고요한 존엄을 회복시키는 과정을 그려냅니다.
개인의 삶과 역사적 격동의 교차점
《로마》는 개인의 기억과 국가의 역사를 절묘하게 엮어낸 작품입니다. 1971년 멕시코시티에서 실제로 발생한 ‘코르푸스 크리스티 학살’을 배경으로 삼아, 영화는 주인공 클레오의 일상 속에 폭력적인 국가 권력의 흔적을 스며들게 합니다. 이 사건은 멕시코 정부의 반체제 시위 탄압으로 수십 명이 희생된 참극으로, 영화 속에서는 클레오가 아기를 낳으러 병원에 가는 도중 시위대와 군인 사이에 끼이면서 등장합니다. 개인의 위기와 사회의 비극이 한 프레임 안에 공존하는 장면은, 영화가 얼마나 정치적 동시에 개인적인지를 보여줍니다.
쿠아론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과도하게 부각하거나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일상의 배경 속에 스며들도록 연출함으로써,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 침투하고 흔적을 남기는지를 보여줍니다. 클레오가 겪는 유산, 여성으로서의 상처, 그리고 가족과의 소속감은 사회적 배경과 떨어져 있지 않으며, 그녀의 고통은 개인의 것이자 집단의 고통으로 확장됩니다. 영화는 이를 통해 ‘역사는 특정 인물만의 것이 아니라, 침묵 속 수많은 사람의 기억에도 존재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또한 《로마》는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영화가 아니라, 현재에도 유효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입니다. 여성의 몸은 여전히 투명하게 여겨지고, 가사노동은 여전히 저평가되며, 계급 간의 간극은 여전히 선명합니다. 클레오라는 인물을 통해 감독은 “누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관객으로 하여금 “내가 기억하지 못한 이들에 대해 나는 얼마나 무심했는가?”를 반추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로마》는 회상의 영화가 아닌, 기억의 재정의에 가까운 작품으로 자리매김합니다.
결론: 침묵과 흑백으로 그려낸 감정의 연대기
《로마》는 침묵의 영화입니다. 누군가는 별일 없는 잔잔한 영화라 말할 수 있지만, 그 잔잔함 속엔 수많은 감정의 결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흑백의 미장센은 기억을 닮았고, 클레오의 침묵은 오히려 가장 큰 목소리가 됩니다. 그녀는 가족의 일부이면서도 외부인이며, 사랑을 주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소한 존재감’이야말로 《로마》가 말하는 역사입니다.
이 영화는 단지 감독의 유년 시절에 대한 헌사가 아니라, 말하지 못한 이들의 존재를 영화 언어로 복원해 낸 기념비적 시도입니다. 관객은 《로마》를 통해 역사는 특정 영웅의 전유물이 아님을, 말없는 인물들의 삶에도 기록될 가치가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소리 없이도, 흑백 화면 위에서도,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잔상으로 남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