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는 DC 코믹스 세계관의 빌런 탄생기를 그린 영화이지만, 동시에 현대 사회가 어떻게 정신질환자를 바라보고 대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영화 속 아서 플렉은 단지 한 인물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외면받고 침묵 속에 방치되는 수많은 이들의 상징이다. 이 글에서는 조커라는 인물의 변화를 따라가며, 정신질환자의 범죄화, 사회적 편견, 그리고 복지 시스템의 붕괴라는 세 가지 축을 통해 생겨나는 ‘낙인 구조’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정신질환의 범죄화: 악인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조커》의 주인공 아서 플렉은 태생적으로 악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코미디언을 꿈꾸며 삶의 의미를 찾으려 애쓰는 상처 많은 성인 남성일 뿐이다. 그러나 그가 처한 현실은 무시와 조롱, 폭력과 빈곤, 그리고 심리적 고립의 연속이다. 영화는 아서의 일탈을 단순히 개인적 일그러짐이 아닌 사회 구조적 실패의 산물로 조명한다.
아서가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들인 지하철에서의 폭행, 직장에서의 해고, 어머니의 과거와 자신의 출생의 진실을 알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그가 외부로부터 단절된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더 이상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 그리고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 영화는 그가 폭력으로 내몰리는 과정을 절대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얼마나 쉽게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야"라고 단정지으며 누군가를 범죄자로 만들어왔는지를 보여준다.
현실에서도 정신질환자는 종종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된다. 그러나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정신질환자가 실제로 범죄를 저지를 확률은 일반인보다 오히려 낮다. 오히려 정신질환자는 범죄의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와 뉴스 속 그들은 늘 ‘위험한 존재’로 그려진다. 조커는 바로 이 허상에 균열을 내며, '범죄'라는 결과가 아니라 그에 이르기까지의 사회적 맥락을 보여준다.
조커는 어느 날 갑자기 악인이 된 것이 아니다. 그가 웃음을 참지 못하는 병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폭행당하고 불쾌한 존재로 배제당한다. 그러면서 점차 무너져 가는 모습을 통해 영화는 묻는다. 진짜 문제는 그의 병인가, 아니면 그 병을 이해하지 못한 사회인가?
사회적 편견과 낙인의 작동 방식
영화에서 가장 잊기 어려운 장면 중 하나는 아서가 상담사에게 외치는 말이다. “당신은 내 말에 관심도 없어. 내 고통엔 아무도 관심 없어.” 이 말은 단순한 대사 그 이상이다. 그것은 정신질환자가 세상 속에서 느끼는 투명함과 고립, 그리고 낙인의 실체를 드러내는 절규다.
현대 사회는 겉으로는 정신건강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고수한다. 아서가 대중 속에서 조롱당하고, 심지어 그의 웃음조차 오해받는 현실은, 사회가 얼마나 이질적인 존재에 대해 배타적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가 감정적으로 불안정할 때 사람들은 ‘이상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붙이고, 그 낙인은 아서가 다시 사회로 복귀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막아버린다.
낙인은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구조화된 폭력이다. 일단 ‘정신질환자’라는 꼬리표가 붙는 순간, 그 사람의 목소리는 덜 신뢰받고, 감정은 과장되거나 왜곡된 것으로 간주된다. 아서가 방송에서 조롱당하고, 결국 폭발하게 되는 장면은 바로 그 낙인의 작용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영화는 ‘조커’라는 이름 자체가 어떻게 낙인을 통해 형성되는지를 말한다. 처음엔 누군가가 그를 조롱하기 위해 부른 이름이었지만, 그는 결국 그 조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낙인은 이처럼 당사자의 자아까지 삼켜버리는 힘을 가진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아서들을 조커로 만들어왔는가? 그리고 지금도 몇 명의 아서들이 세상 속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가?
복지 시스템의 붕괴: 아서를 지켜줄 수 있었던 구조는 어디에 있었는가
아서가 유일하게 의지하던 복지 상담이 끊기는 장면은 영화의 중요한 전환점이다. 그의 목소리를 들어주던 유일한 존재마저 사라졌을 때, 아서는 철저히 혼자가 된다. 상담자는 “우리 모두를 위한 예산이 끊겼어요”라고 말한다. 이 말은 단지 아서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복지 시스템 자체가 얼마나 불안정한지를 드러낸다.
복지는 단순히 치료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가 누군가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최소한의 연대의 선언이다. 하지만 그 선언이 무너질 때, 가장 먼저 떨어지는 사람은 사회적 약자이고, 정신질환자는 그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계층이다. 아서는 그 복지의 단절이 만들어낸 괴물이다.
한국 사회 역시 정신건강 예산과 인프라가 턱없이 부족하다. 정신질환자는 입원 후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며, 퇴원 후 지역사회와의 연결도 약하다. 공공 상담소의 이용자 수는 급증하고 있지만, 상담 인력은 그에 턱없이 못 미친다. 결국 수많은 아서들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고립되고, 그들은 점점 목소리를 잃어간다.
《조커》는 "한 개인의 파괴는 곧 사회 시스템의 실패"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복지 시스템이 아서를 제대로 감싸 안았더라면, 그는 조커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서의 폭발은 시스템이 더는 작동하지 않음을, 그리고 그 시스템의 붕괴가 누구에게 가장 큰 대가로 돌아오는지를 절절히 보여주는 증거다.
《조커》는 한 악인의 탄생이 아니라, 한 인간의 파괴를 담은 사회 보고서다. 영화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언제부터 누군가의 고통을 농담으로 소비하기 시작했는가?" 조커는 우리가 외면한 아서의 복수일지도 모른다. 그는 단지 정신질환자가 아니다. 조커는 돌봄 받지 못한, 이해받지 못한, 구조 속에서 버려진 수많은 사람들의 집단적 초상이다.
정신질환자를 향한 범죄화, 편견, 시스템 붕괴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우리는 더 이상 "누군가 알아서 하겠지"라는 무책임한 기대를 가질 수 없다. 조커의 광기는 그저 한 영화 캐릭터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만든 사회의 거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또 다른 아서가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언젠가 또 다른 조커가 될지 모른다.